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예루살렘은 신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 전쟁 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유대 전쟁이 마무리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로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AD 70년 10월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 69년 12월 21일 원로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게 제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로 사용하였고 그 아들인 티투스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답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로마의 귀족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에게도 개방하였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네로가 탕진한 국고를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명한 콜로세움 경기장을 로마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